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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용, 1944년생 나이 75살

 66년 한살 연상 윤혜영 씨와 결혼 슬하에 2남 1녀

 미숙아로 태어나 생매장 당했지만 

 작은 이모덕에 기적적으로 살아나

 1996년, 심장병 어린이 수술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 검찰 수사 받아, 1997년 2월 무혐의 처분

 당시 정치 보복 의혹이라는 시각 많아 



오늘(5월 1일) 방영되는 '휴먼다큐 - 사람이 좋다'에는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씨가 출연해 자신의 삶과 '올리브' 같이 키 크고 아름다운 지금의 부인 윤혜영 씨를 만난 러브 스토리를 공개한다고 합니다. 


1944년 4월 2일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난 이상용 씨의 삶은 순탄치 않은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이상용 씨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당시에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고 결국 이상용 씨는 거품에 싸인 채 미숙아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집안에서는 생후 3개월 된 이상용 씨를 생매장 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1944년은 일제 말기 시대로 일자리를 얻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상용 씨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떠났지만 이후 소식이 끊겼고 이상용 씨의 어머니는 남편이 북한 회령땅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충남 서천에서 회령(함경북도 백두산 근처)까지 무작정 걸었다고 합니다. 


임신을 한 상태로 배가 고프면 나무뿌리를 씹어먹으면서 허기를 달랬고 그렇게 약 한 달 보름을 걸어서 회령에 도착하지만 이상용 씨의 아버지는 이미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상용 씨의 어머니는 홀로 친정집 부여로 향했고, 그렇게 뱃속에 있었던 이상용 씨는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한 채로 태어납니다. 당시 거품을 물고 태어난 이상용 씨는 숨소리조차 고르지 못한 병약한 상태였고 당시 외가에서는 맑은 영혼을 고생시키지 말고 하늘로 돌려보내자고 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상용 씨는 감나무 밑에 묻혔지만 이를 불쌍하게 여긴 막내 이모(당시 12살)가 이사용 씨를 몰래 꺼내와 천보산으로 도망쳐 일종의 농성을 한 탓에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막내 이모는 "갓난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거냐, 아이를 살려주지 않으면 함께 목숨을 끊겠다"고 산속에서 농성을 했다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이상용 씨는 유아기 내내 병마에 시달렸고 6살이 되어서야 걸음마를 간신히 시작했다고 합니다. 12살 까지 8가지 성인병을 다 앓았고 어린 시절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뱀 800마리를 달여 먹은 경험도 있다고 하네요. 


이사용 씨는 책가방을 들 힘조차 없을 정도로 유약했고 이 때문에 어릴 때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안의 장남이고 종손이었기에, 집안 어른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13살에 삼촌이 "남자는 건강해야 한다"며 사다준 아령을 가지고 매일 운동을 했고 이후 보디빌딩을 시작해 18살에 대전고, 미스터 충남, 1966년 미스터 고려대, 고려대학교 응원단장, ROTC 탱크장교를 거쳐 28살에 CBS 기독교방송에서 방송MC를 시작하며 28살 부터 본격적인 '뽀빠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상용 씨의 학력은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삼림에 대한 이론과 기술, 합리적인 경영방법 연구)를 졸업하고 ROTC 5기로 임관해 1968년 1월 부터 1969년 1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합니다. 



 방송일의 시작 그리고 아내 윤혜영씨와의 러브스토리


이상용 씨는 고려대학교 응원단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자신의 첫사랑(고향 친구)에게 20년 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서울에 있던 그녀의 언니 자취방에 찾아갔다가 지금의 아내인 윤혜영 씨를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고향 친구와 함께 남산을 오르내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 친구는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후 20년 동안 간직했던 사랑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이상용 씨는 다시 한번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가 첫사랑의 언니의 친구인 윤혜영 씨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집에 없는데, 헛걸음을 했구나. 자주 놀러 오렴" 다정했던 윤혜영 씨의 말에 이상용 씨는 호감을 가졌고 그 이후로는 윤혜영 씨를 보기 위해 그 집을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처음에 윤혜영 씨는 이상용 씨를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고 합니다. 오누이처럼 함께 붙어 다니는 시간이 많았고 이상용 씨는 고백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상용 씨는 간첩이 나타났는지 전국에 비상령이 내렸다는 거짓말로 윤혜영 씨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고 이 때, 밤새도록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고 결국 연인관계가 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당시 둘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키작은 사위를 당시 처갓집에서는 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 윤혜영 씨의 키가 170cm에 TBC 3기 탤런트 출신(배우 윤여정 씨와 동기)에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재원이었으니 당연했던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윤혜영 씨는 이상용 씨 하나만 믿고 결혼을 했다고 하네요. 두 사람은 이상용 씨가 66년 대학을 졸업한뒤 바로 다음달인 3월 5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4일 뒤인 3월 9일에 이상용 씨는 광주기갑학교로 입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유성의 만년장 호텔로 신홍여행을 떠났지만 3일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예정된 헤어짐을 슬프게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상용 씨는 ROTC로 3년간 군생활을 하고 아내 윤혜영 씨는 그런 이상용 씨를 끝까지 기다립니다. 69년 제대한 이상용 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외판원 부터 어물전 날품팔이, 오징어 장사, 리어카 땅콩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아내 윤혜영 씨도 결혼 사실을 숨기고 신문사에 취업을 했다가 딸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 퇴사당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갖가지 일을 하던 이상용 씨는 고려대 응원단 단장과 군대에서 문선대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준 경험을 생각해 내고, 연예인을 해보자는 생각에 방송국에 일하는 선배들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1971년 기독교방송에서 방송MC로 방송 일을 시작한 이상용 씨는 1973년 MBC의 '유쾌한 청백전'을 통해 방송 데뷔에 성공합니다. 당시 '유쾌한 청백전' PD가 대전고 선배 유수열 PD였고, 처음에는 "명문대학 까지 나온 사람이 연예계로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타일렀다고 합니다


이후 방송에서 장기란 장기는 모두 선보이고, 알통을 자랑하고 벽돌을 깨고 가슴근육을 움직이면서 '뽀빠이'라는 자신의 캐릭터를 알리기 시작했고 1989년 장교로 군 복무한 점이 인정되어 MBC '우정의 무대' MC로 발탁되면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심장병 어린이 수술기금 유용 누명 그리고 정치 보복 의혹


1970년대 중반, 심장병에 걸린 한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이상용 씨를 찾아와 수술비가 없다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시 서울대 병원에서 나온 수술비만 1,800만원 당시 10평 아파드 가격이 1,100만원에 이상용 씨는 사당동에서 650만원 전세를 살고 있었던 상황.


당시 이상용 씨는 기술이 없어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돈이 없어서 죽으면 안된다고 수술비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명동에 있는 야간업소를 찾아가 사정을 했고 당시 3개의 업소에 진행자로 출연하기로 하고 3달치 봉급을 선불로 받아 수술비를 댔다고 합니다. 


당시 집도 없는 주제에 남의 자식 수술해준다고 집세의 세 배나 되는 돈을 줬다며 아내 윤혜영 씨에게 많이 혼났지만, 이내 용서를 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 이 소식이 전해지고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가 수술을 해달라며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상용 씨는 그 많은 어린이들을 감당할 수 없어 한국어린이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후 이상용 씨는 이 약속을 지켜 1987년 국민훈장 동백상, 가톨릭봉사대상 등을 받습니다.


이런 이상용 씨에게 1996년 당시 대통령(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가 찾아와 국회 의원 출마를 제의합니다. 당시 선행 + 우정의 무대를 통한 전국적인 인기로 이상용 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100% 당선이 보장된 상황.


하지만 이상용 씨는 출마 제의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1996년 11월 3일 '우정의 무대' 화천 녹화가 끝나고 돌아온 이상용 씨는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을 횡령 했으며, 벤츠 600을 타고 다니며, 40억원 짜리 집에 살고 있으며, 심장병 어린이를 한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이상용 씨는 20년간 지프차를 타고 있었고 40평 짜리 빌라의 융자금은 95년에야 상환이 끝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25년간 그가 수술 시킨 심장병 어린이는 567명(이 중 사망 13명)이었습니다.


당시 이상용 씨는 이 허위기사로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퇴출됐고 매일같이 한국의 모든 언론에서 소설같은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단 한명의 기자도 이상용 씨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고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이후 3개월 만에 무죄판결을 받지만 그 결과는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습니다. 당시에 '추적 60분'이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이상용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돌아기고 이상용 씨도 충격으로 일시적인 실명을 겪습니다. 지금도 이상용 씨는 꼬깃꼬깃한 무죄판결문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후 이상용 씨는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하면서 살다, 해당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뒤에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인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했고, 현재는 강연가로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당시 아무도 이상용 씨를 믿어주지 않았지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등이 그를 믿고 지원을 해줬다고 합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상용 씨를 찾아와 "눈이 덮였으니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나느니라"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이 말을 들은 이상용 씨는 수중의 남은 돈 20만원을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1년 만에 귀국해 딸을 시집보내면서 한참을 울었고, 다시는 남 돕는 일을 안 하겠다고 다짐 했다고 합니다.


이상용씨가 누명을 얻었던 96년에서 약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는 남 돕는 일을 안 하겠다고 다짐한 이상용 씨는 여전히 꾸준하게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정의라는 가면에 숨어 연일 소설을 쓴 방송국과 신문사의 기자들은 어떠한 벌도 책임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2012년 방송에서 밝힌 이상용 씨가 567명의 심장병 어린이를 치료하는데 든 비용이 총 74억원, 그 중 상담액을 이상용 씨가 부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67명 중 현재까지 연락이 되는 이는 2명 뿐이라고 합니다.


<뽀빠이 이상용>

<이상용 씨 과거 사진, 41살>

<과거 이상용씨가 방송에서 공개한 아들과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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