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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수남 나이 76살 1943년생

 재테크 실패한 아내 16억 빚 생겨

 쪽지만 남겨두고 도망가.. 

 결혼 후 미국에서 살던 첫째 딸.

 사고로 사망.. 소포로 유해 받아

 하청일 사망 루머 돌기도 했지만 사실아냐

 서수남 블로그 주소 : 서수남 블로그(클릭)



<서수남 딸 사망원인>

서수남 딸 사망원인


1970 ~ 1980년대 활발히 활동하며 1990년까지 약 20여 년간 12장의 음반을 낸 서수남, 하청일 콤비를 기억하시나요? '한번 만나줘요' '과수원 길' 등으로 유명한 두 남성 듀오의 근황에 대해 궁금게 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1943년 생으로 올해 나이 76살의 서수남 씨는 사업 실패와 큰딸 사망이라는 아픔을 이겨내고 현재는 평범한 황혼의 일상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서수남 씨는 매일 운동도 하고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며 네티즌들과 소통하고 매주 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올 8월에는 아프리카의 우간다로 봉사활동을 떠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서수남 씨의 고향은 전라북도 군산이며 한양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습니다(서수남 학력). 고향은 군산이지만 서수남 씨의 아버지가 태어난지 100정도 되던 날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홀어머니와 학창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서수남 씨는 비록 혼자서 살고 있지만 예전 성공 가도를 달릴 때는 몰랐던 '희망'의 의미와 '꿈' 이란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고 합니다. 서수남 씨는 하청일 씨와의 듀오를 마무리 하는 시점(1988년)에서 음악교실을 시작하며 제 2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서수남 씨가 음악 교실을 시작하던 시점부터 노래방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시기를 잘 타, 많은 사람들과 주부들이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서수남 씨의 노래교실을 대박을 치게 됩니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일주일에 노래 강의만 무려 20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연히 서수남 씨는 강사비와 노래교실로 큰 돈을 벌게 되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날 집에 돌아온 서수남 씨는 29년을 함께한 아내가 남긴 메모를 발견 하는데요.  당시 아내가 남긴 쪽지에는 '당신과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겨놓고 떠난다. 빚을 갚아달라"는 내용만 덩그러니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서수남 씨의 아내가 재테크를 한다고 벌어놓은 돈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손해를 보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손을 빌리기 시작하다 빚이 16억 원으로 불어난 것입니다.


당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서수남 씨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서수남 씨의 생각을 간파한 어머니께서 옆에서 아들을 달래고 보듬었고 서수남 씨는 어머니와 세 딸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수남 씨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어머니를 위해 다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음을 굳게 가지고 행사와 노래 강의를 다니며 빚을 갚아 나가기 시작합니다.


서수남 씨는 아내가 사라지고 난 뒤 2002년에 이혼을 하고 2006년 즈음에 빚을 거의 다 갚는데요. 빚을 청산하면서 서수남 씨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소유한 것이 결코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수남 씨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후배들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는 '희망 전도사'로 활발하게 활동을 합니다. 자신이 어려움을 이겨낸 일들에 대해 인터뷰하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다녔었는데요. (2009년 발표한 앨범 제목도 '잘 될꺼야') 


<서수남 부인>


하.지.만 서수남 씨에게 불행은 다시 한번 찾아옵니다. 어려운 시절 자신의 버팀목이자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데 이어, 미국에서 결혼 생활을 하던 첫째 딸까지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것입니다.


딸만 세명인 서수남 씨에게 큰 딸은 더 특별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는 효녀였고, 결혼을 후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더 애틋했다고 하는데요.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당일에 바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서수남 씨는 큰 딸의 유골을 소포로 받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으며,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들을 받나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서수남 씨는 집 가까운 납골묘에 안치한 어머니와, 큰 딸의 유골을 지금도 자주 찾아간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딸의 사망 여파로 서수남 씨는 2010년대 초반에 다시 활동이 뜸해졌지만 지금은 예전의 아픔을 다 극복하고 '폄벙한 황혼의 일상'을 즐기고 있는데요.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충실하게 살자는 마음으로 심장이 뛰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서수남 씨와 함께 활동했던 하청일 씨는 IMF였던 1998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이후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미국에서의 사업에 집중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많 이들과 연락이 안 돼 사망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었는데요.


이는 사실이 아니며 미국 한인 사회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2012년에는 한인 달라스 예술인 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미국 한인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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