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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87의 기문고술자 이근안 

영화 1987 속 실존인물, 이근안 경감 그는 영화1987에서 박처원 치안감의 오른팔이자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 기술자로 나옵니다.


영화를 제외하더라도 그는 故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김전의원은 전두환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안근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과 뇌정맥현전증을 앓다가 201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흔히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3년내에 대부분 사망을 한다고 합니다. 김근태 전 의원도 물고문 후유증으로 심한 비염과 축농증을 앓았으나 고문 트라우마 때문에 수술대에 오르기를 거부했고 고문 기억을 자극하는 기계음이 두려워 치과지료를 기피하는 바람에 치안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고문 후유증으로인해 정연한 논리와, 신뢰감을 갖추고도 약한 대중호소력으로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신지호(당시 한나라당)에게 패배를 하는 등 정치활동에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민주화가 시작되고 12년을 숨어지내던 이근안은 1999년 경찰에 자수를 했고 징역 7년형을 받아 만기출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깔끔하게 새 출발을 했습니다. 고문 기술자에서 목사의 삶을 선택한 것인데요. 

그 이유로 그는 '회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그는 2012년 종교계의 거센 반발로 교단에서 면직됐습니다.)


이근안은 출소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땐 애국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2010년 12월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연에서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공안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중략)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됐고 그래서 예수쟁이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많이 본 레파토리 아닌가요? 친일파가 해방 후 친미파가 된 것 같은..


과거 김전의원은 출소한 이근안과 마주쳤는데 이근안이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 가식적이어서 용서해주지 못했는데.. 이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근안은 설교 중 자신이 김근태 의원을 고문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건전지 하나 들이대면서 겁을 줬더니 빌빌거리더라." 고 비웃는 모습을 보이며 본색을 들어냅니다.


이근안씨는 최근 아내는 요양원에 입원 시킨 후 동대문 다세대 주택 지하방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가 화제가 된 이후 이근안씨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한 기사가 있으니 근황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기사를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903851


이근안은 작년 2017년 <거문도 이내창 살인사건>에 등자하기도 했었습니다.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씨가 거문도에서 사체로 발견된 사건, 그 때 거문도에서 이내창씨와 마지막으로 있었던 사람은 국정원 여직원으로 밝혀졌죠?

그 여직원은 지금도 잘 살고 있더군요. 당시 방송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 때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89년 사라졌었던 이근안이 거문도에서 숨어지냈다라는 소문을 확인하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방송을 통해 당시 정권이 그의 도피생활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근안 이전에는 노덕술 그리고 그 뒤의 진짜 고문기술자들

이근안 이전 일제시대에는 노덕술이라는 고문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경찰로 일하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습니다. 항일 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데 앞장섰으며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 승진가도에 올랐습니다. 


해방 이후 그는 월남하였고 곧 이승만 정권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 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습니다. 당시 여운형 암살 배우로 거론되기도 했으며,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당시 독립투사 중 거물인 김원봉을 체포, 뺨을 때리는 등의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사실인지 아닌지지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는 그저 기술자뿐이라며 그의 석방을 종용했습니다. 

그는 이 시기 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무공훈장 세 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 커녕 상을 받은 셈이지요.

그 이후에 그는 60년 울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합니다.(물론 낙선)


이후 그는 68년 68세 나이로 서울 자택에서 편안하게 죽습니다. 

2014년 그는 뜬금없이 울산의 인물 후보로 선정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후에 취소됨.)


이근안, 노덕술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점 2. 그 뒤에는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결국은 쓸쓸한 결말을 맞이했다라는 사실.


그러나 고문 기술자 이근안,노덕술의 쓸쓸한 말년과 달리 그 뒤에 숨어 있었던 진짜 고문기술자들과 그 부역자은 오늘날까지도 누구보다 편안하고 떵떵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데요. 


물론 최근 들어 많은 것들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대한민국의 '로열패밀리' 입니다.



 반복되는 적폐의 연결고리



만약 해방 이후 새워진 정부에서 반공이라는 방패 아래 실패한 적폐 청산들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80년대 이근안이라는 고문 기술자는 있었을까요? 

이근안과 노덕술이라는 고문 기술자 뒤에는 진짜 고문기술자인 당시 정권들이 있었습니다.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 숨어있었던 이런 문제점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튀어나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습니다.


2016년 10월 1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부산 엄궁동 갈대숲 살인사건'을 다루며 이 사건 역시 경찰의 가혹행위로 인한 거짓 자백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는데요. 당시 용의자들의 변호인은 현 문재인 대통령으로 인터뷰를 통해 


"장씨는 당시에 시력이 아주 나빴다. 그런데 범행장소는 완전 돌밭이었다. 게다가 그날은 달도 없는 캄캄한 그런 밤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쫓고 쫓기는 식의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을 때 이게 (거짓이라는) 나름의 확신을 가졌다"라고 말하며 변호인 인생 중 가장 한이 남는 사건이었다." 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 용의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21년 후 감형을 받아 출소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사회 곳곳의 적폐들을 직접 보고 가장 많이 느꼈을 문대통령님이 앞으로 남은 기간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적폐들을 잘 청산해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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